계암일록은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 ~ 1641)의 일기로, 김령은 조선 중기 안동 출신 문신이며,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이며 예안 출신이다. 1590년부터 그가 별세할 때까지 약 40여년 간 쓴 일기이다.
계암일록(溪巖日錄) 계유년(1633, 인조11) 3월
계유년(1633, 인조11) 3월
3월 19일
맑고 바람이 불었다. 종 암(岩)이 돌아와서 큰아이의 편지를 전하였다. 방백(方伯)이 인삼 1냥쯤, 납제(臘劑) 4종을 보냈는데, 약봉지에 소합원(蘇合元)을 쓰지 않았고 용뇌(龍腦)와 사향(麝香)도 분간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이 사람은 매사에 정밀하지 못한 흠이 있는데, 천성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다스리는 재능은 있어서 사람들이 다 칭송하였다. 우리 도의 신임 도사(都事) 이경항(李慶恒)이 도의 경계에 다다랐다.
3월 26일
맑음. 밥을 먹은 뒤에 큰아이를 보내어 예안 현감이 전에 들러준 것에 사례하도로 하였다. 돌아올 때 예안 현감이 인삼 조금과 용뇌고(龍腦膏) 1환을 보내주었다.
○ 도사(都事) 이경항(李慶恒)이 안동에서 현으로 들어왔다.
계암일록(溪巖日錄) 계유년(1633, 인조11) 9월
계유년(1633, 인조11) 9월
9월 19일
맑음.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에 손필대(孫必大)가 임명되었다. 이경항(李慶恒)의 후임이다. 지난달 20일 이후에 암행어사 이상질(李尙質), 이효영(李孝永), 오전(吳竱), 신천익(愼天翼), 임광(任絖), 정뢰경(鄭雷卿) 등 모두 6명이 행장을 꾸렸는데, 모두 말하기를, ‘이미 각자 맡은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했지만, 우리 도에 누가 오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계암일록(溪巖日錄) 정축년(1637년, 인조 15년) 6월
정축년(1637년, 인조 15년) 6월
6월 16일
짙은 안개가 끼었다가 갰다. 김윤(金鋆)․김덕창(金德昌)․황유장(黃有章)이 와서 점주(粘酒)를 대접했다.
○ 봉화 현감 강초(姜趠)가 고과(考課)에서 하(下)를 맞아서 예안 현감이 봉고(封庫)하는 일로 봉화에 갔다. 강초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설 전에 봉화 현감에 임명되자 속히 내려왔는데, 그의 아버지가 뒤처져서 오랑캐의 칼날을 만나 처와 딸, 며느리 등이 모두 사로잡혔는데도 태연히 개의치 않았다. 그의 파직은 참으로 당연하지만 예안 현감이 고과에서 상(上)을 맞은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음이 심하다. 감사(監司)가 도회(都會)를 시행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시기가 아닌데도 또한 지나가는 고을마다 유생과 동몽(童蒙) 등이 고강(考講)때문에 감사를 기다렸다고 하니 더욱 가소롭다. 오후에 들으니, 우리 고을 수령 김경후(金慶厚)가 사간원의 계사(啓辭) 때문에 파직을 당하고, 신임 현감이 이미 출발했다고 한다. 바로 이경항(李慶恒)이다. 김경후가 봉화에 봉고(封庫)하러 가다가 중도에 이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예안 현감의 아들 김문욱(金文郁)이 남과 대화할 때 “세도가에게 죄를 얻은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매우 가소롭다. 세도가가 어떻게 관여했겠는가?
계암일록(溪巖日錄) 정축년(1637년, 인조 15년) 7월
정축년(1637년, 인조 15년) 7월
7월 9일
흐림. 신임 현감 이경항(李慶恒)이 부임하자 품관(品官)들이 보러 들어갔는데, 침묵하며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매를 맞은 하인이 매우 많았다.깜깜해서 큰아이가 향교에 갔는데, 대개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모레 알성(謁聖)하기 때문에 통문을 내어 생도(生徒)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어 비가 내렸다.
계암일록(溪巖日錄) 무인년(1638년, 인조 16년) 2월
무인년(1638년, 인조 16년) 2월
2월 28일
맑음. 예안 현감(禮安縣監) 이경항(李慶恒)이 처음 올린 사직서에 감사가 제(題) 하기를 “말미 받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먼저 물러나 돌아가니 아주 타당하지 않다. 장계(狀啓)를 올려 처리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겸관(兼官)에게 봉고(封庫)토록 하였다. 그렇다면 반드시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계암일록(溪巖日錄) 무인년(1638년, 인조 16년) 5월
무인년(1638, 인조16) 5월
5월 11일
맑음. 오시에 이희송(李希松)이 들렀다. 오후 늦게 허용(許蓉)·류시원(柳時元)·이지원(李之垣)이 들러서 백주(白酒)를 여러 잔 마셨다. 제군들이 민호에서 납부하는 은어 때문에 분주했다. 진실로 그럴 것이다. 우리 읍의 전임 수령 이경항(李慶恒)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그대로 유임된다면 틀림없이 좌수 윤동창(尹東昌)에게 무함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같이 떠날 결심을 한 것이었다. 윤동창의 사람됨은 이경항도 알았던 것이다.
계암일록(溪巖日錄) 무인년(1638년, 인조 16년) 10월
무인년(1638, 인조16) 10월
10월 9일
맑음. 경차관의 행차에 필요한 반찬거리를 민간에서 거두었다. 생꿩, 기신어(其申魚), 백문어(白文魚), 계란, 대구어(大口魚) 등 명목이 아주 많았다. 전임 수령인 이 군(李君 : 이경항)은 병사(兵使)가 장차 올 때에 미리 관아의 하인들에게 해산물을 사오게 하여 민간에 번거롭게 하지 않았었다.
10월 16일
맑고 추웠다. 예안 현감은 음식을 좋아한다고 평소에 이름이 났었는데 경차관의 반찬거리를 징수하는 것을 빙자하여 많은 물품을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는 데 썼다. 홍유환(洪有煥)의 아들로 하여금 동상례(東床禮)를 열게 하여 이날 계상(溪上)으로 달려갔으니 이 사람의 이러한 일은 일상적인 일임을 알 수 있다. 베 46필로 말을 사서 추잡하다고 생각 했더니, 아랫것들과 한 통속이 되었다. 아랫것들의 방종함이 날로 심해진다. 전임 수령 이경항(李慶恒)이 있을 때 관아의 문 앞이 쓸쓸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차이가 천리는 된다고 할 것이다.
계암일록(溪巖日錄) 무인년(1638년, 인조 16년) 7월
무인년(1638, 인조16) 7월
7월 13일
맑음. 사부(師傅) 심광수(沈光洙)가 들렀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 강원(江原) 감사이다. 심 군은 일 때문에 장차 영덕(盈德)으로 향할 예정인데, 여기에 들러 술을 몇 잔 마신 뒤에 안동으로 향했다. 삼남(三南)에 파견된 도사(都事)가 무명인 이었으므로 교체했는데, 대시(臺侍) 중에서 아주 정밀하게 가려서 차출하여 임명했다. 우리 도는 심대부(沈大孚)이다. 전임 도사 여위로(呂渭老)가 장차 봉화(奉化)로 가서 초정(椒井)에서 목욕할 예정이었으나 면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날 도로 안동으로 달려갔다. 전임 예안 현감 이경항(李慶恒)이 처음에 부임했을 때는 치정에 대한 명성이 아주 자자했다. 조금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며 간사한 아전들을 위엄으로 통제했다. 이 때문에 현에서는 읍민들의 마음이 쏠려 떠날 때 도로를 가로막는 일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청렴한 명성은 당초와 달라지고 처음의 기대감으로 책망하며 따지게 되자 모두 불만을 품게 되었고, 아랫것들은 심하게 질투하다보니 거짓말을 꾸미는 일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것은 모두 관아의 물품이었다. 심지어 창고의 이자 곡식에 이르기까지 1섬도 손대지 않았다면서 운운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모두가 그 거짓을 알게 되었다. 가장 칭찬할 만한 것은 아전을 엄격하게 부려서 기세를 부리지 못하도록 한 것이고, 기타 시행한 일도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다. 이를테면 오랑캐 사신이 왔을 때의 세금 납부는 백성들이 모두 덕을 보았는데, 이와 같은 사람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수령 양 공(梁公 : 양원(梁榞))은 말미를 얻어 함양(咸陽)의 본가에 갈 예정으로 한꺼번에 두 대의 옥교(屋轎 : 지붕이 있는 가마)를 만드느라 관아 앞에는 장인들이 가득하고, 여러 가지 해 나가는 일이 자기마음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비록 선성(宣城 : 예안) 수령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전들을 두둔하여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게 한데다가 아무개 일과 아무개 일 등이 사람들에게 소문이 난 것을 두고 모두 마음에 차지 않아 했다. 우리 읍이 어진 수령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운수 때문일 것이다.
7월 23일
맑음. 전임 수령 이경항(李慶恒)이 떠나갈 때, 실제와 달리 지나치게 헐뜯은 것은 모두 관아의 아전들과 좌수 윤동창(尹東昌)이 지어낸 말이다.
계암일록(溪巖日錄) 무인년(1638년, 인조 16년) 12월
무인년(1638, 인조16) 12월
12월 25일
맑고 몹시 추웠다. 서조모의 기일이라서 술과 떡을 준비하여 보냈다. 큰 아이의 편지를 보았다. 어제 안동 부중에서 밤에 가곡(柯谷)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김시추(金是樞)는 이조에서 재감인(才堪人)으로 추천했기 때문에 이번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당연히 수령이 될 것이니, 분주하게 다닌 공이 증험될 것이다. 정전(鄭佺)과 권굉(權宏)도 처음에 함께 다녔으나 마침내 제거되고 오직 시추만 의망(擬望 : 추천)했는데, 더럽기가 심했다. 어찌 입에 올릴 거리가 되겠는가.
이언영(李彦英)의 첩의 아들이 참판 김장생(金長生)의 첩의 사위가 되었는데, 감사 이경증(李景曾)에게 나아가 고변하기를, “김영(金榮)과 김비(金棐)가 역모를 했습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은 모두 참판의 죽은 아들이다. 이언영도 보증인으로 김반(金槃)과 영천(永川) 수령 한덕급(韓德及)을 내세웠다. 공초(供招)에 관련된 한덕급은 참판의 사위이다. 그러나 길에서 전해들은 소문이라서 그 상세한 것은 파악할 수 없다.
우리 읍의 전임 수령 이경항(李慶恒)은 얼음을 채취할 때 민간에 역(役)을 부과하지 않고 지난 분기 내의 미수질(未收秩)을 기준으로 부과했기 때문에 미수질 장정 1명당 얼음 2정(丁)씩을 납부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남아돌아서 질중(秩中)에 고루 역을 부과하지 않고 그 장부를 불살라 버렸다. 지금 수령은 미수질 장정 1명당 얼음 6정씩 납부하라고 하니, 탐욕스럽고 비루하기가 날로 심하다. 아전들과 읍민들이 그를 큰 도적이라고 부른다.
계암일록(溪巖日錄) 경진년(1640 인조18) 2월
경진년(1640 인조18) 2월
2월 16일
아침에 추웠다. 청명(淸明)이다. 선친 산소의 배소를 오늘 행하였다. 아이들이 생질 한(僩)과 함께 방잠 재사(芳岑齋舍)에 갔다. 오시에 요장(耀章)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돌아왔다.
○ 병사(兵使) 이언척(李言惕)이 영천(榮川)과 풍기(豊基)를 지나 봉화(奉化)에 이르렀는데, 모레쯤 우리 현(縣)에 들어온다고 한다. 봉화 수령 김위(金瑋)가 갑자기 부모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영광(靈光)으로 달려갔다. 우리 읍의 수령 양원(梁榞)이 겸관(兼官)으로 봉화에 갔다. 우리 읍에서는 병사에게 바치는 반찬거리를 민호(民戶)에서 거두도록 책임을 지웠는데, 크고 작은 품목들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양원의 사람됨은 이와 같은 것은 참으로 늘 있는 일이다. 이전 수령 이경항(李慶恒)은 털끝만치도 번거롭게 하지 않았었다. 저물 무렵에 아이들이 방잠 재사에서 돌아왔다. 한밤중이 지나고 닭이 울 때에 지진이 일어났다.
계암일록(溪巖日錄) 신사년(1641년, 인조 19년) 2월
신사년(1641년, 인조 19년) 2월
2월 17일
조금 맑고 추웠다. 감사가 20일 이후에 우리 고을로 올 예정인데, 이바지할 찬거리를 민간에서 거두지 말고 관에서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였다. 전에는 크고 작은 사신과 빈객이 방문하면, 온갖 물목을 백성에게 내도록 요구하여 이미 고질적 폐단이 되었다. 이경항(李慶恒)이 비로소 중지시켰으나, 양원(梁榞)이 다시 되살려 그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이때 와서 또 개혁하였고, 왜인에게 이바지할 꿀을 백성에게 반으로 줄여서 내도록 하였다. 예안 현감의 치적에 관해 칭찬할 만한 것이 한둘이 아니니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시에 김옥(金鋈)이 밖에 와서 ‘이명철(李命哲)․권환(權寏)은 벌주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극력 말하였다. 저녁에 막내 아이가 방잠 재사에 가서 광진(光進)과 함께 잤다.